6번 글쓰기=>*마키아벨리 군주론* 자주국방 *이순신 장군 난중일기* 셋째 아들 전사 [2025년 12월 05일]
작성자 최고관리자

 

 

                6번 글쓰기=>*마키아벨리 君主論* 자주국방

              *이순신 장군  亂中日記*에서 셋째 아들 전사 

                           [2025년 12월 05일]

0.마키아벨리 君主論 [The Prince]

1.마키아벨리 생존=>서기 1469년~~1527년=>58세

2.국가=>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

3.군주론=>서기 1532년 출간[죽은 후 5년]

4.군주록 핵심내용

  1]이탈리아 통일국가의 가능한 정부형태 모색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

      『군주론』은 제1장에서 제11장까지 군주국의 여러 종류(유형학)와 그 성립과정에 대해 기술한다.

         세습군주국, 복합군주국(기존 세습군주국의 군주에게 정복되어 편입된 군주국), 교회형 군주국, 

         완전히 새로 탄생한 군주국 등이 분석된다. 완전히 새로 탄생한 군주국의 유형으로는 

         자신의 군대와 능력으로 탄생한 신생군주국, 다른 세력의 군대와 행운으로 기반을 얻게 된 

         신생군주국, 부정하고 사악한 방법을 통해 군주의 자리에 오른 유형, 

         시민의 호의로 군주가 된 유형 등이 있다.

         . 


  2] 自國 軍隊의 중요성 
     제12장부터 제14장까지는 군대의 종류를 검토하고 군주가 군사에 정통해야 함을 밝히고 있다.
     군대에 대한 본질적인 명제는 국가장치로서의 이데올로기와 법에 대한 군대의 우위성

     (군대는 제1의 핵심적인 국가장치로서 국가를 구성하고 실재적인 물질적 존재를 부여한다), 

     군사에 대한 정치의 우위성(군대, 그 구성, 편제, 유용성 등은 우선적으로 정치적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이라고 한다.
     마키아벨리는 군대의 종류로 傭兵, 支援군, 混成군, 自國군 등을 검토한다. 

     그 결과 군주는 자신의 군대가 없으면 절대 안전할 수 없으므로 자국 군대를 가져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탈리아도 용병 사업이 성황을 이뤘는데, 이탈리아 용병은 다른 유럽 용병에 비해서도 유달리 비싸고 무능했다.

      무기는 상상을 초월하게 화려했지만, 용기나 직업의식은 엉망이었다. 

      승리든 패배든 용병에게는 고용 종료를 의미했다. 

      도시 간에 전쟁이 벌어지면 고용주의 금고가 텅 빌 때까지 시간을 질질 끌거나 주변을 약탈했다. 

      도시 입장에서는 승리하든 패배하든 파산이었다.

 

  3] 군주의 정치적 실천
     제15장부터 제25장까지는 군주의 실천원리를 설명한다.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종교와 도덕 그리고 윤리로부터 완전히 분리해낸다. 

     정치는 결과를 중시하고, 그 과정에서 수단을 도덕으로부터 해방시킨다. 

     또한 인간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이를 통치에 이용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 부분은 동양의 병서나 법가와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군주는 짐승(힘에 의존하는 것)과 인간(법률에 따르는 것)의 성품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군주는 奸巧한 여우사자의 勇猛함을 같이 활용해야 한다. 

     군주는 인민의 미움을 받거나 경멸당할 만한 일들은 그 어떤 것이든 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군주는 측근의 충성심을 유지시키기 위해 그를 잘 관찰하여 우대하고 부유하게 만들며 친숙하게 

     대함으로써 명예와 책임을 나누도록 해야 한다

     군주가 阿諂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자신에게 불편한 진실을 듣더라도 결코 화내지 않는다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하는 것 외에는 없다

     운명에 대담하게 맞서야 한다. 신중한 행동보다는 과감한 행동이 낫다.

 

     귀족들은 억압하기를 원하지만 인민들은 억압받지 않기를 원하므로 인민들의 목표가 더 정의롭다. 

     인민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군주는 인민을 적으로 삼게 되면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지킬 수 없다. 

     군주는 언제나 동일한 人民들과 함께 살아야 하지만 동일한 귀족들과 살아야할 필요는 없다.

     군주는 기필코 인민들과 좋은 관계를 가져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군주는 곤경에 빠졌을 때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다.

     군주에게 가장 훌륭한 요새는 인민이다. 人民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이다

 

 

0.이순신 장군  亂中日記

1.  <난중일기>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동안 직접 쓴 전쟁 일기입니다. 

      오늘 몇 척의 왜선이 어디서 움직였는지, 조선 수군의 병력·군량이 어떻게 줄었는지, 날씨, 

      부하들의 상태, 상부의 압박, 심지어 본인의 감정까지 아주 솔직하게 적어 놓았죠.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영웅담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한 지휘관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록하고, 어떻게 버텼는가”를 보여주는 

      사실상의 위기 관리 매뉴얼로 읽힙니다

 

2. 무언가를 잘 헤쳐 나가고 결정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거는 이렇게 입체적입니다. 

    지휘관, 결정하는 사람의 마음, 그 사람들을 움직이고 활용할 수 있는 부하, 무기, 군량미 

    여러 가지 상태들 그리고 당시의 날씨, 적군의 상태 이 모든 걸 기록한다는 건 그걸 읽고 해석했다라는 거죠. 

    이순신 장군 정말 대단하신 분이지만 이걸 난중일기를 통해서 보면 한 번 대단함을 느끼게 됩니다. 

    

 3. <난중일기>는 조선 선조 때의 무신이자,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인,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기간동안 쓴 일기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개월 전인 1592년 정월부터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12월 14일까지. 

      총 2,539일간이 기록된 일기죠. 

      이 책의 초고본은 현충사에 비치 돼 있고,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이후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4. 2539일간 일기를 쓰고 기록하는 게 그냥 학생들이 숙제로 하는 것도 어려운데요.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장수가 그것도 전세를 바꿀 수 있는 핵심 장수였던 이순신 장군이 

    전투를 치르며 기록한 겁니다. 

    그냥 기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게 여기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리더에게 요구하는 덕목도 여기서 나올 수 있을 텐데요. 

    치열한 전란 속에서 일기를 이렇게 쓴 이유가 궁금합니다. 

   

5.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를 쓴 이유한 줄로 정리하면, 

   “먼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6. “1592년, 임술년 1월 1일. '난중일기의 첫 일기’ “1592년 1월 초하루, 하늘이 맑았다.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그리고 아들 회가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멀리 떠난 채, 또다시 남쪽에서 설을 맞게 되니 가슴 깊은 회한을 이기기가 어려웠다. 

     그때 병마절도사의 군관 이경신이 찾아와 절도사의 편지와 설 선물을 전했다. 

     긴 화살과 편전, 그리고 여러 잡다한 물건들이었다. 

     그렇게 그 해의 첫날을, 그리움과 책임감 속에서 시작했다.”

 

7. “1597년 10월 14일, 날이 맑았다. 사경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던 중

     말이 발을 헛디뎌 냇속으로 떨어졌으나나는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 뒤로 셋째 아들 면이 나를 껴안는 듯한 모양이 어른 어른 보이더니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저녁이 되자 천안에서 온 이가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했다. 

     아직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았는데 살과 뼈가 먼저 떨리고 마음이 황망해졌다. 

     겉봉을 대강 찢어보니 예가 쓴 ‘통곡’ 두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셋째 아들 면[葂]이 전사했다는 걸 알아챘다.

일본군이 충청남도 아산에 위치한 본가를 습격하자 가족들과 피난하던 중

이면은 아산 탕정면 용두리와 염치읍 백암리 부근 용두천에서 일본군과 격렬히 싸웠습니다.

활과 칼을 들고 용감히 싸워 적장 세 명을 베었으나, 치명상을 입고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8. 나도 모르게 맥이 탁 풀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통곡하고 또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토록 어질지 못할 수 있는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산다는 것이 무슨 괴상한 이치란 말인가. 

     온 세상이 캄캄해지고 해조차 빛을 잃은 듯 바래 보인다.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버렸느냐. 출중하고 영민한 너를 하늘이 끝내 이 세상에 남겨두지 않는구나. 

     나의 죄가 네게 화가 되어 돌아갔구나. 나는 이 세상에 살아 있으나 앞으로 어디에 의지하고서야 할지 모르겠다. 

     부르짖고 서글프게 울 뿐이었다. 하룻밤을 넘기기가 한 해를 건너뛰는 것처럼 길었다.”

 

 9. 아들이 슬프게 죽고 난 뒤에 이렇게 일기로 담담하게 그 심정과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들 ‘이면’은 1597년 10월 14일 전사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가족을 왜군들이 포로로 잡아서 장군을 좀 압박하려고 했을 때 굴복하지 않고 싸우다 

     죽은 걸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상황을 탓하면서 스스로 슬퍼합니다. 

    ‘장수인 내가 죽어야지 왜 아들인 네가 죽느냐’라고 슬퍼하는 아버지의 마음도 느껴졌고요.

 

0.이순신 장군 가계도 [1541.4.28~~1598.12.16] 53세

1.아버지=>이 정 [덕수 이씨] [1511~~1583]

2.어머니=>변씨 [초계 변씨] [1515~~1597.4.11]

3.부인=>상주 방씨 [방수진] [ 80세까지 생존]

4.첩=>해주 오씨 [부안댁] [2남2녀]

5.장남=>이 회 [1567~~~미상][임실 현감]

6.차남=>이 율 [1571~~미상]

7.삼남=>이 면 [1577~~1597.1.14] 전사 [이순신이 가장 사랑함]

8.외동딸=>미상

 

 

0.유족회장 생각

1.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이 드러난 부분이다. 

2.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심정을 어떻게 형용할 수 있을까. 

3.숱한 죽음을 눈앞에서 겪었지만 아들의 죽음 앞에서 목 놓아 통곡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부모다. 

 

작성자=>대한민국 순직군인 유족회장

작성일=>2025년 1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