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번 글쓰기=:>북한에서 유엔군 포로의 학대 5773명 [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27일]
작성자 최고관리자




                 17번 글쓰기=:>북한에서 유엔군 포로의 학대 5773명

                       [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27일] 

0.유엔군 포로

1. 유엔군. 70년 전 미국, 영국,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터키 등 21개국이 낯선 나라 한국의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그들 중 무려 5만 7933명이 전쟁 기간 중 목숨을 잃었습니다.


2. 한편으로, 유엔군과 관련해 우리가 잘 모르는 역사도 있습니다. 

   유엔군 포로. 북한군은 유엔군 포로와 관련해 문서를 많이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인원 집계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기록으로는 5773명의 유엔군 포로가 송환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그 외 다수가 식량 부족과 질병, 학살에 의해 희생됐습니다.

 

3. 28일 육군군사연구소의 ‘한국전쟁기 공산군의 유엔군 포로 관리와 성격’ 보고서에 따르면 1950년 11월 중공군 개입 이후 

   전선이 38선 일대로 고착화되면서 유엔군 포로 다수가 평양, 평안북도 등의 북한 후방으로 이송 됐습니다.

4. 당시 북한의 도로와 철도 대부분이 파괴됐고 유엔군이 제공권을 확보했기 때문에 포로들은 2~4주 가량 

   산과 강을 건너는 험난한 여정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5. 북한군은 행군 과정에 포로들에게 따로 ‘식수’를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물을 마시려면 눈치껏 논밭에 고인 물이나 눈을 먹어야 했습니다. 

   식사는 하루 2번 아침과 저녁에 옥수수와 콩, 잡곡, 감자 등으로 해결했습니다. 

   포로들은 식기가 없어 옷이나 모자에 음식을 담아 먹었습니다. 



6. 적개심이 강했던 북한군은 부상병 들것 이동’을 금지시켰습니다. 

   낙오하면 구타 당하거나 사살됐기 때문에 유엔군 포로들은 눈물을 머금고 끊임없이 걸어야 했습니다.

 

7. 호송하는 북한군은 마을을 지날 때면 밤이라도 주민들을 깨워 “저 따위 미국놈들을 동정해선 안 된다”고 

   조리돌림을 했습니다. 


8. 임시 포로수용소는 주로 집과 헛간, 학교, 절, 굴, 방공호, 탄광 숙소 등이었습니다. 

   포로들은 악명 높았던 이곳을 ‘죽음의 계곡’, ‘콩밥 수용소’, ‘수프 수용소’로 불렀습니다.

9. 1951년부터 휴전 때까지는 14개의 ‘영구 포로수용소가 설치됐습니다. 

   유엔군은 주로 제1~5포로수용소에 있었고 중공군 관리를 받았습니다.

  압록강을 따라 80킬로미터에 걸처 있습니다.

 

10. 미 24사단의 윌리엄 중위는 “1951년 초 중국에서 생선 박스가 왔지만 안에는 생선보다 구더기가 더 많았다. 

   포로들은 배가 고팠지만 생선을 버려야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11. 사정이 이런데도 북한군은 삐라(전단)에 ‘음식이 그리 좋진 않지만 전투 현장에 있는 것보단 낫다’고 

   선전하기도 했습니다. 성인 남성의 하루 권장 섭취 열량이 2500㎉인데 이런 음식은 열량이 고작 최대 1600㎉ 밖에 

   되질 않았습니다. 또 비타민과 무기질 부족으로 결핵, 이질 등이 나돌아 죽음이 이어졌습니다.

12. 그런데 포로 심문 과정엔 상황이 달랐습니다. 심문소에선 개고깃국, 쌀밥, 계란, 코코아 등과 담배를 지급했습니다. 

   그러나 심문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다시 수용소 음식으로 바꿔 지급했기 때문에 고통은 계속됐습니다. 

 

13. 정전협정 논의 과정에도 포로를 최대한 많이 살려두기 위해 고깃국과 두부, 달걀, 설탕, 미역, 마늘, 소금 등의 

   음식을 주고 ‘포도당 주사’를 놔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전협정이 지지부진해지자 다시 음식은 원래대로 돌아갔습니다.

 

14. 반면 미군 포로들은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상처와 배설물로 악취를 풍기는 동료를 건물 밖으로 끌어내 

   동사시키거나 담요 등의 개인물품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낙담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15. 참다 못한 미군 군의관들이 국제적십자사나 유엔군을 통해 식량과 의약품을 공수받는 방법을 제안했지만

    중공군은 “포로들이 더 좋은 대우를 받게 할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습니다.

16. 유엔군 폭격을 피하기 위해 포로수용소 지붕 등에 ‘POW’(전쟁포로)를 표기하자고 했지만, 

   일부 수용소는 “미 공군기가 공산군을 계속 살상하는 한, 미군 포로들도 특별보호를 받을 권리가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17. 악질반동으로 지목된 포로는 수개월간 지하감옥에 감금하고 협조를 약속해야 풀어줬습니다. 

   중공군은 그들을 선전용 포로인 ‘평화의 투사’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복귀 후 동료들에게 

   “나는 첩자 임무를 수행할 것을 지령 받고 다시 수용소로 돌아오게 됐다. 내 설교를 믿지 말라”고

    속삭여 중공군의 속셈을 은밀히 알렸습니다.

18.그들은 그렇게 1953년 7월 휴전까지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견뎠습니다. 

   험난한 여정을 견뎌낸 그들은 결국 생존으로 승리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역사입니다.

 

0.유족회장 생각

1.유엔군 포로 내용은 자료가 많이 없습니다.

2.일부 증언을 통해서 알려지고 있습니다.

3.유엔군 포로가 되어 고생하시다 운명하신 장병들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작성자=>대한민국 순직군인 유족회장

작성일=>2026년 1월 21일